차량의 전장화 물결 속에 전통적인 퓨즈와 릴레이 기반 전력분배 방식이 한계에 봉착했다. 최신 차량에는 과전류 보호와 스위치 기능을 결합한 전자식 퓨즈(eFuse) 솔루션이 도입되어 정밀 제어와 진단 기능으로 안전성과 효율을 크게 높이고 있다.

자동차에서 퓨즈는 평소 존재감이 없지만, 막상 타버리면 운전자가 퓨즈 박스를 열고 작은 집게로 갈아 끼워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거로운 작업이 머지않아 과거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리비안과 테슬라를 비롯한 최신 전기차들은 전통적인 블레이드 퓨즈 대신 일명 ‘디지털 퓨즈’를 도입하고 있다. 이 eFuse(전자식 퓨즈) 소자는 회로 보호용 퓨즈와 스위치 릴레이 기능을 한 칩에 통합한 것으로, 더욱 똑똑하게 전원을 제어해주는 신기술이다.
전력 분배의 발목 잡는 기계식 퓨즈의 한계
전통적인 자동차용 퓨즈는 기계식 소자로서 작동이 느리고 부정확하며, 한 번 동작(단선)하면 교체해야 한다. 과전류 상황에서 퓨즈가 끊어지기까지 지연이 길면 회로나 장치에 손상을 초래할 수 있어, 제조사들은 이를 막기 위해 넉넉한 안전 마진을 두고 설계한다. 예를 들어 차량 부하의 정상 전류보다 50~80% 높은 전류에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퓨즈 용량을 정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 결과 회로에 훨씬 굵은 배선과 큰 용량의 부품을 사용하게 되어 시스템 무게와 비용이 증가한다. 퓨즈의 응답 지연과 낮은 정확도는 결국 자동차의 안전에도 간접적인 위험 요소가 된다.
게다가 기존 퓨즈는 상태를 모니터링하거나 진단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과부하가 반복되면 열화되어 예고 없이 끊어져 버린다. 사용자는 퓨즈가 나간 뒤에야 문제를 알 수 있고, 일일이 물리적으로 교체해야 한다. 릴레이 역시 기계식 접점이라 장시간 사용 시 마모나 접촉 불량 위험이 있다. 요컨대 퓨즈+릴레이 기반 전력 분배 구조는 현대 차량 전장 시스템이 요구하는 정밀 제어와 원격 모니터링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업계의 전력 반도체 담당자는 “지금까지 사용된 기계식 퓨즈와 릴레이로 구성된 전력 분배 아키텍처로는 더 이상 대응이 어렵기 때문에, 모두 전자식 퓨즈로 대체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변화의 근본 배경에는 자동차 산업의 메가트렌드가 있다. 인피니언 등 반도체 기업들은 차량의 전동화/전자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이라는 세 가지 흐름을 강조한다. 실제로 전기차를 비롯한 신차 개발에서는 기계식 부품을 줄여 차량 전장 설계를 단순화하고 경량화하려는 요구가 크다. 전기차의 주행거리 향상을 위해 차량 와이어 하네스를 최적화하고 무게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새로운 존(zone) 아키텍처 등 중앙집중식 전장 구조를 도입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수십 개의 퓨즈와 릴레이로 구성된 종래의 배전 방식이 걸림돌이 되며, 자연스럽게 반도체 기반 전자식 전력 분배로의 전환이 추진되고 있다.
반도체 스마트 스위치로 진화하는 ‘디지털 퓨즈’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주목받는 솔루션이 스마트 전원 스위치, 일명 전자식 퓨즈(eFuse) 기술이다. 반도체 소자가 회로의 과전류를 감지하면 전자적으로 출력을 차단하여 퓨즈와 같은 보호 기능을 수행한다. 동시에 릴레이처럼 평상시에는 전원을 공급하거나 차단하는 스위칭 역할도 한다. 일부 차량 엔지니어는 eFuse를 “퓨즈와 릴레이의 결합에 더 똑똑함을 갖춘 장치”라 묘사하기도 했다 즉, 퓨즈+릴레이를 하나의 칩으로 대체하면서도 전류 흐름을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두뇌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전자식 퓨즈는 고정된 용단 특성을 가진 기계식 퓨즈와 달리 유연한 동작 설정이 가능하다. 과전류 임계값이나 차단까지의 시간곡선(I²t 특성)을 소프트웨어 혹은 하드웨어 설정을 통해 조정함으로써, 상황에 맞는 보호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부하의 작동 모드에 따라 일시적으로 높은 돌입전류를 흘려주되 일정 시간 초과시 차단하는 식으로 정교한 보호 곡선을 구현할 수 있다. 또한 전자식 퓨즈는 반복적인 과부하에도 스스로 복구할 수 있어 유지보수가 용이하고, 실시간 진단/모니터링 데이터를 시스템에 보고하여 사전에 이상을 감지할 수도 있다. 과전류로 차단된 후에도 단순히 소자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ECU 명령으로 다시 활성화하여 쓸 수 있는 재사용 가능한 퓨즈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런 반도체 솔루션은 회로 보호 정확도를 높여 배선 두께의 최적화를 가능하게 한다. 기계식 퓨즈처럼 지나치게 보수적인 여유를 잡지 않아도 되므로, 전체 하네스 무게를 줄이고 전력 손실을 낮출 수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퓨즈와 릴레이로 구성된 기존 기계식 전원 분배를 고정밀 스마트 스위치로 전환하면 회로 규모와 배선 무게를 크게 줄여 차량의 연비와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차량 전력망을 보다 가볍고 단순하며 지능화된 구조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전자식 퓨즈의 장점이다.
인피니언 PROFET™ Wire Guard 12V로 보는 스마트 퓨즈 사례
이러한 디지털 퓨즈 기술의 실제 구현 사례로, 인피니언 테크놀로지스(Infineon)의 PROFET™ Wire Guard 12V 스마트 하이사이드 스위치를 들 수 있다. 이 소자는 기존 인피니언 PROFET 시리즈의 후속 제품군으로, 여러 혁신을 통해 퓨즈 완전 대체를 목표로 개발되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이전 세대 스마트 스위치는 대기 시 소모 전류(암전류)가 수 mA 수준으로 높고 I²t 보호곡선을 지원하지 못해 퓨즈를 완전히 대체하기 어려웠으나, 신제품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크게 개선되었다. 실제 Wire Guard 12V 제품군은 다음과 같은 향상된 기능을 제공한다.
- 정확한 I²t 보호 특성 : 과전류 값과 지속 시간을 함께 고려한 보호커브를 내장하여, 배선이 견딜 수 있는 전류-열 스트레스 한계를 정확히 모사한다. 최대 6가지 커브 중에서 용도에 따라 선택 설정할 수 있어, 기계식 퓨즈보다 훨씬 정밀한 과전류 차단이 가능하다. 이로써 다양한 와이어 두께에 하나의 디바이스로 대응할 수 있으며, 기계식 릴레이나 퓨즈를 대체하면서도 배선 보호를 최적화한다.
- 고속 과전류 감지 및 차단 : 과전류 임계값을 외부 저항 설정으로 조절 가능하며, 임계치 이상의 급격한 과부하 발생 시 즉각적으로 회로를 차단하여 상위 시스템을 보호한다. 돌발 단락 등 고장 부위를 신속히 분리함으로써 차량 전원망 전체의 안정성을 높여준다.
- 대용량 부하 지원 모드 : 출력에 큰 입력 커패시터나 모터 등 커패시티브 부하가 있을 경우, 초기 돌입전류를 안전하게 충전하는 CLS 모드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헤드램프, 전동 모터 등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과도 전류도 오작동 없이 처리하여 시스템 신뢰성을 확보한다.
- 초저전력 Idle 모드 : 차량 주차 또는 장시간 정차 시 자동으로 저전력 모드로 전환되어, 출력이 켜진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소비 전류를 약 50 μA 수준까지 낮춘다. 이는 기존 제품 대비 암전류를 획기적으로 줄여 배터리 방전을 방지하며, 퓨즈처럼 항상 연결된 출력을 요구하는 전원 회로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한다.
- 일원화된 진단 인터페이스 : 별도의 진단 핀 하나로 최대 5가지 주소의 신호를 순차 출력하는 시퀸셜 진단 기능이 있다. 이를 통해 과전류 차단 동작(OCT)이나 I²t 경고/동작 상태, 센서 출력 정확도 검증, 단락/과열 고장 진단 정보를 시스템에 제공한다. 하나의 핀으로 다양한 상태 정보를 다중화해 송출함으로써 차량 ECU와의 인터페이스를 단순화하고, 기능 안전 요구에 대비한 자가진단을 지원한다.

Sequential Diagnosis
- 높은 전류 및 안전 등급 지원 : 해당 제품군은 현재 최대 40A 내외(정격에 따라 15\~27A 수준)의 부하 전류까지 커버하며, 2025년 말에는 36A까지 대응하는 상위 제품도 추가될 예정이다. 과열 보호 등 고신뢰성 설계로 자동차의 혹독한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동작하며, ISO 26262 ASIL-D 수준의 안전요건을 만족하도록 설계돼 중요한 전장 부품에도 적용 가능하다.
인피니언에 따르면, PROFET Wire Guard 12V 솔루션은 이미 일부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양산 차량에 채택되었다. 독일의 프리미엄 브랜드와 중국의 신흥 전기차 OEM에서 배선 보호와 퓨즈 대체를 위해 이 스마트 스위치를 적용한 사례가 있으며, 향후 더 많은 차종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대상 애플리케이션으로는 전동 시트 모터, 워터펌프/히트펌프, 조명 제어, ECU 전원분배 등 다양한 분야가 거론된다. 기존에는 이러한 부하에 전원 릴레이와 퓨즈를 병렬/직렬로 사용해야 했지만, 이제는 한 개의 반도체 소자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상태 모니터링까지 가능해진 것이다.
한편 개발 엔지니어들이 이러한 스마트 전력분배 장치를 손쉽게 설계에 반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툴도 마련되어 있다. 인피니언의 경우 Automotive Power Explorer 등의 설계 툴을 통해, 설계자가 사용 중인 로드 프로파일(부하 특성)이나 배선 사양을 가져와 Wire Guard 제품의 보호 성능과 비교해볼 수 있다. 이 툴은 선택한 eFuse 소자가 주어진 부하/배선 환경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보호를 수행할 수 있는지 시뮬레이션 해주며, 조정 가능한 과전류 임계값에 맞는 저항 값 계산, 내장된 I²t 커브 중 어느 것을 고를지 안내하는 기능도 포함한다. 또한 센싱 정밀도나 소자의 전력 소모 등을 산출해 열 설계와 신뢰성 검증에 활용할 수 있다. 이처럼 제조사에서 제공하는 전용 툴과 자료를 활용하면 새로운 디지털 퓨즈 소자의 설계 적용이 한결 수월해진다.
향후 전망: “경험을 쌓아 변화에 대비해야”
자동차 전장 시스템의 전자화 흐름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지만, 결국 거스를 수 없는 변화라는 데 업계의 의견이 모아진다. 인피니언의 이종민 매니저는 “전자화가 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팩트”라고 언급하며, 전장 부품 설계업체들이 지금부터 관련 경험을 축적해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현재 당장 모든 차량에 디지털 퓨즈가 적용되지 않더라도, 선도 업체들은 여러 신규 프로젝트에 시범적으로 이러한 반도체 보호 소자를 적용해보며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반도체 부품의 특성을 익히고 활용하는 능력이 곧 설계 경쟁력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자동차가 "바퀴 달린 컴퓨터”로 불릴 만큼 전자화·지능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전기를 다루는 기본 요소인 퓨즈마저 디지털 혁신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퓨즈의 반도체 대체가 전기차는 물론 내연기관 차량에도 차츰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자동차 전력분배 시스템의 패러다임 전환이 성큼 다가온 지금, 개발자들은 새로운 기술을 적극 받아들이며 다가올 변화를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